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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칼럼] 고개 들면 목 날아간다…헤게모니의 역설

미국 헤게모니 공유 꾀했다가 몰락한 일본 '반면교사'
중국 덩샤오핑 "“미국에는 100년간 도전하지 말라”
한국, 동의・협력 바탕 '기술・문화 헤게모니' 도전해야

[산업경제뉴스=임종순 칼럼니스트] 지금 세계는 살벌한 글로벌 주도권 싸움 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최근 미국의 베네주엘라 침공에 이르기까지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벌어지는 패권 전쟁은 연일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글로벌 주도권’과 ‘헤게모니’다. 단어 자체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 의미의 깊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특히 일본,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3국은 이러한 담론에서 직접 언급될 만큼 영향력이 큰 국가들이기에, 그 배경과 향후 추이를 살펴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에 앞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헤게모니에 대한 고찰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회 지배 구조를 헤게모니 개념으로 설명했다. 헤게모니는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나 강압적인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이 피지배 계층의 자발적인 동의와 협력을 얻어내는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람시는 지배 계층이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사용한다고 보았다.


문화적 헤게모니: 예술, 문학, 종교, 교육 등 다양한 문화적 영역에서 지배적인 가치관과 이념을 전파하여 피지배 계층의 인식을 지배하는 것.


정치적 헤게모니: 정치 제도, 법률, 정책 등을 통해 지배 계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피지배 계층의 불만을 무마하는 것.


경제적 헤게모니: 생산 수단과 자본을 소유한 지배 계층이 경제적 우위를 통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


그람시는 헤게모니가 단순히 지배 계층의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피지배 계층의 자발적인 동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이나 혁명뿐만 아니라 문화적, 정치적 영역에서 기존의 가치관과 이념에 도전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광의의 개념으로 헤게모니를 설명한 그람시와는 달리 오늘날의 헤게모니는 정치·경제·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확보하는 협의적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패권(覇權)’이라는 한자 표현은 흥미롭다. ‘패(覇)’는 으뜸을 뜻하고, ‘권(權)’은 저울추를 의미하는데, 저울이 무게와 가치를 측정하는 도구인 만큼 이는 곧 시장과 권력의 주도권을 쥔다는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되는 패권은 현실 속에서 양면성을 지닌다. 한편으로는 ‘세계 평화 유지, 경제 질서 안정, 문화 교류 확대’에 기여하는 긍정적 의미를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국의 주권 침해, 불평등한 관계 강요, 갈등 유발’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제국주의와 유사하게 인식되기도 한다.



◆ 실패한 일본, 멈추지 않는 중국

서구 열강들의 전유물쯤으로 여겨지던 패권 쟁탈전에 나선 아시아 국가가 바로 일본과 중국이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는 전혀 상이한 구조로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980년대 제조업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시절, 그들은 경제력을 중심으로 미국과 함께 글로벌 헤게모니를 공유하려고 했었다. 


이를 이끈 인물이 바로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최장수 총리를 지낸 나가소네였다. 그는 과감한 행정개혁과 미국과의 관계 강화로 일본의 전성기를 이끌며 헤게모니 획득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해군 대위 출신으로 군 복무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이를 바탕으로 ‘일본국 불침항모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본의 헤게모니 공유를 주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은 곧 한계에 부딪혔다.


당시 절대강국이던 미국이 자신의 패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고, 일본 경제력이 커질수록 오히려 견제와 경계의 태도를 강화한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또한 일본 내부적으로는 과거사 반성 부족, 폐쇄적 사회 구조, 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으며, 이는 글로벌 헤게모니 주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과거사 문제와 사회적 폐쇄성은 주변국의 반발을 불러왔고,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얻지 못해 종국엔 고립을 자초했다는 분석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일본의 공동 헤게모니 주장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미국과 맞먹으려던 시도는 부패 사건과 함께 35년 장기집권하던 자민당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플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거치며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재 미국과 치열한 글로벌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사정이 좀 다르다. 중국 현대사에서 기억나는 장면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본다면 한층 이해가 쉬워질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는 중국의 개방을 이끌어낸 등소평 시절의 일화다. 그는 생전에 “미국에는 100년간 도전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미국과 대등해지기 위해서 중국이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본 것이다. 


둘째, 2001년 미국 EP-3 정찰기가 남중국해에서 중국 전투기(J-8)와 충돌해 해남도에 불시착한 사건이다. 사죄 문제, 승무원(24명) 송환, 정찰기 반환 문제로 미·중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중국 일부에서는 정찰기 반환을 거부하고 미국처럼 ‘에어포스 원’을 보유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장쩌민 주석은 “아직 중국은 세계 제1의 국가가 아니며 더 힘을 키워야 한다”고 달래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등소평과 마찬가지로 그는 미국에 맞서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자신들의 야망을 구체화시키기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택한 사례지만 후진타오에 이어 권좌에 오른 시진핑은 다른 길을 택했다.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내세우며 미국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야심을 드러낸 첫 번째 중국 지도자인 셈이다. 그 자신감의 근원이 바로 고도 경제성장과 WTO 합류로 축적한 막대한 자금이었다. 미국과 함께 G2 국가 반열에 올랐다는 자부심은 그들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배경이 되었지만 그 도전이 쉬울 수는 없었다. 


중국의 좌시할 수 없었던 미국의 거센 반발이 문제였다. 시진핑의 중국몽은 오바마(8년), 트럼프(4년), 바이든(4년)을 거치며 심화된 갈등에 직면해야 했고. 다시 맞이한 트럼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더 큰 압박에 놓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은 경제·군사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있지만, 미국과의 경쟁 격화, 주변국들의 경계, 내부적 문제, 국제 질서 변화 등 복합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문화적 헤게모니, 한국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

그간 강 건너 불구경에 만족하고 있던 한국이 최근 들어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처럼 노골적인 도전 의사를 내비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을 둘러싼 기류가 그를 허락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주변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세이지만, 우리는 지정학적인 장점, 세계 10위의 경제력, 한류 등 소프트파워와 문화적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강점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와 협력하여 우리만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행보지만 그 길을 이어갈 방법으로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먼저 국제적인 동맹 관계를 강화하여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안보,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더불어 국제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기후 변화, 빈곤 문제, 인권 문제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국제적인 협력을 주도하는 것도 효율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K-pop,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고 긍정적인 국가 이미지 창출에 앞장서는 동시에 기술 혁신, 산업 고도화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와 인재 양성에 매달리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사회 불평등, 저출산 고령화, 청년 실업 등 내부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토대 마련에 소홀하지 않는다면 이같은 주장은 얼마든지 현실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처럼 정치적, 군사적으로 힘을 과시하고, 밀어붙이는 헤게모니를 주장하기에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동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기술, 문화적인 영역에서 기존의 것에 도전하는 것으로 우리만의 새로운 헤게모니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람시가 말하는 문화적인 헤게모니가 바로 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예술, 문학, 기술,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배적인 가치관과 이념을 전파하고 이를 통해 글로벌 주도권을 잡아야 할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임종순 칼럼니스트 / 서울여자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전 한국가스공사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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