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과 폭염, 산불과 홍수라는 자연의 공습으로 살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평생 머물러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기후난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그런 그들을 감싸안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법과 제도가 정비되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본지는 소외되고 외면받기 십상인 기후난민들이 처한 현실과 국제사회가 보여주는 차가운 홀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기후난민들의 힘겨운 발걸음을 따라가본다. <편집자 주>
[산업경제뉴스 손영남 기자] 초점 잃은 시선, 오랜 굶주림으로 복수가 들어차 불룩해진 배를 힘겹게 둘러메고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기후난민을 묘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곤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니만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게 하는 장치로 작용했음은 당연하다.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일 터. 그러나 그는 사실이 아니다. 기후난민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을 뿐, 그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처한 한국인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때문이다.
매년 여름이면 기다렸다는 듯 등장하는 국지적 호우는 때론 논과 밭을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서는 도심의 광활한 공간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반지하에 사는 이들은 침수로 인해 집을 잃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일마저 빈번하다.
기후 재앙은 그에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 들어 왕왕 발생하는 대규모 산불은 보다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재난 문자에 따른 일시적 대피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전소되어버린 집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심심치 않기 때문이다. 채 대처할 수도 없었던 기후의 반란에 집을 잃고 허둥거리는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기후난민일 수밖에 없다.
◆ 산불과 홍수로 집 잃은 이재민, 기후난민과 다를 바 없어
퍼붓던 쏟아져내리는 폭우로 집을 잃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선 대규모 산불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자동차를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다른 나라의 일이 아니다. 바로 지금의 한국에서 매해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주요 언론들은 인재(人災) 운운하며 사태의 원인을 한곳으로 몰라가지만 사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도심의 하수처리시설이 감당할 수 없는 폭우를 단순히 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일이 바람직하지는 않은 탓이다. 산불도 다를 바 없다. 누군가가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 혹은 잡풀을 태우다 비롯된 실화를 원인으로 꼽지만 그 역시도 일차적인 분석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갈수록 산불은 연중화·대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림청의 발표에 따르면 1980년대 대비 산불 발생 건수와 피해 면적 모두 급증한 것이 그를 증거한다. 이것이 오롯이 인간의 실수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달라진 기후 조건이 산불의 대형화, 연중화를 부추긴 정황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르면:기온이 2도 상승 시 산불위험지수는 13.5%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근거로 추정 시 21세기 말까지 산불 발생 위험은 최대 158% 증가가 예상된다.
결국 최근 들어 빈도수가 잦아진 산불은 인재의 탓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높아진 기온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의미다. 매번 반복되는 대응책이 한층 공교해진다고 해도 산불과 홍수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재민의 증가다. 우리에겐 이재민이라는 용어가 친숙하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들 역시 기후난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기후위기로 임박한 위험에 직면한 사람을 강제로 본국에 송환할 경우 인권 침해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고 정의한 유엔의 발표에는 부합하지 않시만 이재민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을까.
◆ 제도적 공백 속 늘어나는 한국형 기후난민 다수
현실로는 쉽게 체감되지 않지만 기후난민에 버금가는 인권 침해에 시달리는 이재민의 수는 적지 않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자연재해로 인해 집을 떠난 국내 이재민의 수는 약 3만 명에 달한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기후 재난이 반복적으로 발생한 지역의 인구 감소율은 전국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를 체감하는 곳이 바로 농촌이다. 가뭄과 폭염 등의 영향이 직접적인 구조를 지닌 농촌 지역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다. 생계를 유지할 기반시설인 논과 밭, 과수원, 축산업 공간이 파괴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도시로의 이주를 결심하게 된 때문이다. 결국 기후 재난에 따른 이주를 선택한 것. 이재민을 기후난민이라 칭하는 이유다.
바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원치 않은 이주에 따른 적절한 보상책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는 기후난민들이 받고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일까. ‘기후난민’이라는 개념이 아직 법적으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미비하니 지원할 근거도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기후난민을 예로 들어보자. 전지구적인 현상이니만큼 이와 관한 기준 마련은 주로 UN에 귀속된다. 현재 UN은 기후 변화로 인한 강제 이주 현상 자체는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아직은 설익지 않은 기후난민이니만큼 기존 난민협약에는 해당되지 않고 그러다보니 구체적인 보호 체계는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밀려드는 기후난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유럽 등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 한국이다. 당연히 기후난민을 대하는 방법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우리 이재민들, 즉 한국판 기후난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이재민들처럼 실제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새로운 지역으로 옮겨야 했던 사람들을 구제하는 실질적 대응책은 크게 미흡하다. 재난지원금이나 임시 거처 제공 등이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그는 한시적인 대응에 불과하다. 보다 본질적인 지원, 즉 장기 정착 지원이나 명시적 법적 지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도적 공백이 초래한 한국형 기후난민의 실상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예산은 약 3조 7천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 실제로 기후 이주민의 정착을 위한 지원에 사용되는 예산은 전체의 1%에도 못 미친다. 대부분의 정책은 재난 복구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주 이후 삶을 재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기후난민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이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향후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후로 인해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인식하고 보호하며, 함께 살아갈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