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경제뉴스 손영남 기자] 탄소중립 시대로 향하는 발걸음이 갈짓자 행보를 보이면서 정부와 기업 모두 심각한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지속되면서 대외적 신인도 하락과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동시에 떠안게 된 것. 이에 보다 강력한 대책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즉각적인 탄소세 도입을 주장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 상황은 여의치 않다.
지난 21일 본지가 보도한 ‘“시기상조 vs 경쟁력 강화” 탄소세 도입 바라보는 두 얼굴’에서 언급한 것처럼 향후 신정부를 책임질 대권후보들 그 누구도 탄소세 도입을 공언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점이 그것. 공약으로도 언급되지도 않은 현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탄소세 도입이 언제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마냥 쉴 수만도 없는 형편이다. 2050년을 마지노선으로 천명한 탄소중립 목표를 실현하려면 하루가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탓이다. 결국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중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배출권 거래제의 강화다.
일각에서는 현재 배출권 거래제가 실효성 부재로 유명무실해진 것을 들며 평가절하하려 들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하는 비상 상황이다. 찬밥 더운밥 가리다가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공짜 탄소 시대 초래한 무기력한 배출권 거래제도
배출권 거래제가 백안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허술한 구조로 인해 기업들의 무임승차를 사실상 방조해왔다는데 있다. 배출권 거래제는 기업이 배출할 수 있는 탄소량을 할당받고, 초과 배출 시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를 통해 기업들이 탄소 감축을 위한 기술 혁신을 촉진하고, 시장 원리에 따라 부담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탄소배출로 인한 비용을 들이고 싶지 않다면 탄소배출을 줄이라는 식이다.
상식적으로는 비용 절감에 무엇보다 민감한 기업 생리상 탄소배출을 줄일 것이라 판단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 무료 쿠폰을 발부받는 방법이 그것이다. 동네 마트도 아닌데 그게 가능할까 싶지만 놀랍게도 지금까지 배출권 거래제는 그 방식을 고수해왔다. 지난 2015년 도입 이후 90% 이상의 배출권을 무료로 할당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배출권 총수량 6억 2800만톤 중 97.1%가 무상할당되고 경매(유상할당)는 2.9%에 그쳤을 정도로 무상할당 비율은 압도적이다. 기업들의 부담을 덜고 단계적인 탄소 저감 절차를 이끈다는 판단하에 이뤄진 이 결정이 배출권 거래제를 무기력한 제도로 몰락시킨 장본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출권을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별도의 비용을 들여 탄소배출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찔한 부분은 또 있다. 무료로 할당받은 배출권을 다 소진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현재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대표적인 탄소중립 선도국인 유럽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수준이다. 탄소배출로 인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아도 될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적인 평가일 정도로 한국의 배출권 가격은 저렴한 수준이다.
지난 21일,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가 발간한 '2024 배출권거래제 운영결과 보고서'의 연도별 배출권 거래시장 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배출권의 톤당 평균 거래가격은 9167원으로 집계됐다. 첫 거래가 시작된 2015년 1만 1013원보다 낮아진 것이다.
올해 들어 배출권 가격이 더 하락하면서 27일 기준 배출권 가격은 8950원으로 8000원대까지 떨어졌다. 현재의 가격으로선 기업들에 더 이상 탄소배출을 감축시킬 유인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탄소 저감을 위해 들이는 비용보다 배출권 가격이 더 낮다면 선택은 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 배출권 가격 비싼 EU의 높은 감축 효과 주목해야
기업들이 맘놓고 탄소를 뿜어내는 상황을 막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부담의 크기를 가중시키는 것, 즉 배출권 가격을 올리는 것이다. 너무 단순한 방법이지만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비용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면 결국 탄소배출을 줄여야 하는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환경부와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12월 31일 국무회의에서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2026~2035)’을 심의·확정했다. 골자는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달성을 위해 배출허용총량 설정 강화와 유상할당 확대를 꾀한다는 것. 특히 4차 할당계획 기간에 발전 부문 유상할당 비율을 대폭 상향하고, 발전 외 부문은 업계 경쟁력과 감축 기술 상용화 시기 등을 고려해 유상할당 상향 수준을 조정한다는 방침이다.
배출권 가격 자체를 올린다는 내용은 없지만 지금까지 배출권 가격 폭락을 이끈 주범이 무상할당 위주의 구조였음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가격 인상도 뒤따르지 않겠냐는 관측이다. 늦었지만 인식의 변화가 발생한 것만으로도 반가운 대목이다.
다만 6월까지 나와야 했던 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 발표가 늦어질 것으로 보이는 점은 아쉽다. 계획 수립에 필수 데이터인 국가배출량통계를 확보하지 못한 때문이다. 정부는 조속한 부처 협의를 통해 최대한 빠른 시기에 발표를 하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기상의 문제일뿐 4차 계획 발표는 기정사실이다. 이에 따른 반발의 기류가 포착된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탄소 배출로 인한 부담을 호소해온 기업계의 일관된 자세였기 때문이다. 이달 초 한국경제인협회가 최근 매출액 기준 1000대 제조기업을 대상으로 한 탄소중립 정책 기업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기업의 52.5%는 배출권거래제의 유상할당 비중을 현행 10%로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
예상됐던 반발이지만 2030 NDC보다 강화된 감축 목표를 제시해야 하는 2035 NDC 수립을 위해서는 큰 변동 없는 계획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정부로서는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이득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비용 상승을 두려워한 기업들이 탄소 감축을 위한 기술 개발과 운영 방식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이는 탄소 감축 목표 실현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또한 배출권 유상할당이 증가하면 정부의 기후대응기금 수입도 늘어나, 친환경 산업 지원과 탄소 감축 정책 강화에 활용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다.
유상할당 비율이 높고, 배출권 가격 또한 높은 유럽의 경우, 기업들이 감축 기술 개발에 적극 투자에 나섬으로써 탄소 감축 효과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면 배출권 거래제도 자체가 무가치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파리협정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탄소 가격으로 2030년에 톤당 75달러(약 10만원) 수준을 제시했는데 이는 현재 유럽이 처한 상황과 일치한다. 당장은 힘들다 해도 우리 또한 이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방증이다.
배출권 거래제 하나로 지금의 과제를 오롯이 해결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냉정하게 보면 배출권 거래제는 탄소세를 보조해주는 조연에 가깝기 때문이다. 탄소세와 배출권을 함께 운영하는 국가들 대부분은 탄소세를 통해 배출권거래제가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를 보완하거나, 탄소가격을 강화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탄소세가 도입된 이후에 논할 일이다. 탄소세 도입을 장담할 수 없는 현재는 배출권 거래제를 강화함으로써 국가와 기업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출권 거래제는 현재 국가 배출량의 74%를 관리하는 가장 핵심적인 온실가스 감축 제도다. 지금으로썬 그 제도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탄소중립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버텨야 하고 꿩 대신 닭이라도 잡아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